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,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.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알렉산더 폰 팔켄하우젠 (문단 편집) === [[주중 독일 군사고문단]] 단장 시절 === 1935년 건강상의 이유로 퇴임한 전대 재중 독일 군사고문단장 [[한스 폰 젝트|젝트]]의 후임으로 [[중화민국/국민정부|중화민국]]에 파견되어 1935년부터 1938년까지 3년간 4대 주중독일 군사고문단장을 지냈다. 이후 그는 [[국민혁명군]]을 독일식으로 훈련시키고 독일제 대포([[88mm 대공포|88 mm]] 등), 소총([[게베어 1898#중국|중정中正 소총]] 등)을 전달하였다. 그는 상하이에서부터 난징까지의 길목에 강력한 방어진지를 구축하도록 중국군을 지도하며 [[우쑹 전투]] 등을 참관, 일선에 나가 진두지휘했다. 이로 인해 [[제2차 상하이 사변]]에서 중국군은 일본군을 상대로 전에 없는 뛰어난 전과를 올렸지만 결국 국민당 장교진과 장제스의 역량 및 경험 부족으로 상하이를 내주어야 했고 상하이를 점령하는데 개고생을 했던 [[일본군]]이 빡치면서 일어난 결과가 [[난징대학살]]이었다. 1937년부터 중화민국과 일본 제국을 중재하려던 독일의 [[트라우트만 공작]]이 실패로 돌아가고 일본 제국이 독일 측에 팔켄하우젠을 비롯한 독일 고문들을 중국에서 철수시킬 것을 요구하자 송환이 결정되었다. 팔켄하우젠은 중국에 남겠다는 의사를 표명했으나 오지 않으면 가족들에게 불이익을 주겠다는 위협에 어쩔 수 없이 장제스가 베푸는 고별 만찬에 참여한 다음에 주중 독일 대사인 오스카 트라우트만과 함께 1938년 6월 고국으로 돌아가면서 "나는 중국이 결국 승리를 거둘 것이라 확신한다. 일본은 [[중일전쟁|전쟁]]과 [[평화헌법|평화]], 모두 짊어지게 될 것이다." 라는 말[* 미국 주간지 타임, 1938년 7월 18일]을 남겼다.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-BY-NC-SA 2.0 KR으로 배포하고,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.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.캡챠저장미리보기